부엌 벽의 짧은 메모

부엌 한쪽 벽에 종이 한 장이 붙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식사 후 아내에게 잘 먹었다고 말하기’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지금은 건강이 조금 더 나은 95살 할아버지가 혼자 일어나 앉기도 힘든 93살 아내의 밥상을 챙기고 있지만, 그 메모는 두 사람이 함께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을 많이 배우지 못한 시골 사람이라고 낮춰 말합니다. 하지만 평생 자신을 보살펴준 아내에게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는 태도에는 삶에서 얻은 깊은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거창한 말이나 특별한 선물 대신, 식사 뒤에 건네는 짧은 인사로 감사의 마음을 매일 확인하는 것입니다.

“식사 후 아내에게 잘 먹었다고 말하기.” >부엌에 붙은 이 문장은 단순한 생활 지침이 아니라, 오랜 세월 서로를 돌본 부부의 마음을 보여줍니다.

가족이 서둘러 시골집을 찾은 까닭

추석을 앞두고 아버지는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시골에 다녀오자고 했습니다. 명절 교통 체증을 피하려는 이유도 있었지만, 100살을 바라보는 작은할아버지 부부의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약해지고 있다는 걱정이 컸습니다. 작은할머니가 좀처럼 식사를 하지 못한다는 소식에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묻어났습니다.

가까운 도시에 사는 삼촌은 올해 들어 평일 대부분을 시골집에서 보내며 두 노인을 살폈습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고모들도 주말마다 번갈아 찾아왔습니다. 가족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누군가 곁을 지키고 필요한 일을 나누는 방식으로 돌봄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집안에서 작은할아버지는 오랫동안 중심을 지킨 사람이었습니다. 일찍 아버지를 잃은 아버지에게 작은할아버지는 의지할 수 있는 어른이었고, 농사를 지으며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조카들의 가족까지 보살폈습니다. 어린 시절 그를 바라본 가족에게 작은할아버지는 마을 한가운데 뿌리내린 큰 나무처럼 든든한 존재였습니다.

가족을 모으는 일이 행복이라는 가르침

아버지는 젊은 시절 도시에서 사업을 일구며 자신감 있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사태(나라의 외화가 부족해 국제기구에 긴급한 지원을 요청한 경제 위기)를 거치며 오랫동안 바친 사업체를 잃었습니다. 그 뒤 교회에 깊이 의지하게 된 아버지가 제사상 앞에서 절 대신 묵념하자, 작은할아버지는 이를 나무라기보다 호탕하게 웃었습니다.

작은할아버지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절을 하느냐, 묵념을 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조상과 부모 덕분에 지금의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서로 건강한 모습으로 만날 수 있다는 데 감사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의식의 형식이 달라도 가족이 함께 모여 안부를 나누는 시간은 남길 수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절을 하든 묵념을 하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건강한 모습으로 이렇게 찾아와 주니 그게 행복 아니겠냐.”

세월이 흐르면서 사촌들이 가정을 꾸리고 아이들이 태어났고, 온 가족이 한 번에 모이기는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명절도 각자 집에서 보내는 일이 많아졌지만, 집안의 가장 어른인 작은할아버지를 찾아뵙는 일은 이어졌습니다. 결혼이나 출산, 대학 입학, 취업처럼 가족에게 중요한 일이 생기면 시골집을 찾아 인사를 드렸습니다.

흩어지는 가족을 위해 마련한 자리

작은할아버지는 나이가 들면서 농사를 그만두고 논밭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습니다. 한동안은 집 마당에서 양봉을 하며 소일거리로 삼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집안 어른들의 묘를 한곳에 모으는 일을 자신의 마지막 과제처럼 여겼습니다. 흩어진 묘를 찾아 한데 모으면 후손들이 길을 잃지 않고 찾아와 서로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후손들에게 자신과 아버지 세대는 어느 어른의 묘가 어디 있는지 알지만, 고향을 떠나 살아온 다음 세대는 이를 잊기 쉽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상을 기억하는 일을 단지 과거를 돌아보는 문제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족이 함께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소식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작은할아버지는 묘역을 마련한 뒤 가족들이 묻힐 자리까지 미리 정해두었습니다. 아버지는 시골에 갈 때마다 자신이 누울 곳을 확인했고, 젊은 시절 일찍 세상을 떠난 부친과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친 모친의 묘 앞에서는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는 일은 남은 가족에게 삶의 끝을 알려주는 동시에, 가족이 어떤 관계로 이어져 있는지 생각하게 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이어진 돌봄

할머니가 요양병원에 계실 때 아버지는 병원을 찾을 때마다 간식 세 상자를 챙겼습니다. 한 상자는 간호사들에게, 한 상자는 같은 병실의 어르신들에게, 나머지 한 상자는 할머니에게 드릴 몫이었습니다. 한 사람만 챙기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곁에서 함께 지내는 사람들에게도 마음을 나누려는 습관이었습니다.

할머니가 기력이 약해져 더는 음식을 삼키기 어려워졌을 때, 병원은 콧줄을 이용한 인공영양을 제안했습니다. 인공영양은 음식을 먹기 힘든 환자에게 관을 통해 영양을 공급하는 방법입니다. 호스피스·완화의료(회복이 어려운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줄이고 삶의 질을 돌보는 의료)를 하는 의사인 가족은 아버지와 평소 죽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왔지만, 그날 아버지는 이미 자신의 판단을 내린 듯 큰아버지를 설득해 콧줄 삽입을 거절했습니다.

그 선택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통곡하듯 울었고, 할머니에게는 최소한의 수액만 투여됐습니다. 가족은 할머니가 편안하게 생을 마쳤다고 기억합니다. 누구에게나 같은 선택이 정답이 될 수는 없지만, 이 가족에게는 환자가 겪을 부담과 편안함을 함께 고민한 결정이었습니다.

그 뒤 큰아버지도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에게 죽음은 막연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의 차례가 다가오는 일처럼 느껴졌습니다. 가족은 두려움에만 머무르지 않으려 더 자주 만났습니다. 여동생은 아이가 어릴 때 여름과 겨울 방학마다 한 달씩 친정에 머물며 부모와 시간을 보냈고, 다른 가족들도 가능한 주말마다 본가를 찾았습니다.

한 그릇의 자장면이 만든 작은 잔치

아버지는 삼촌에게 작은할머니가 며칠 전 자장면을 맛있게 드셨다는 말을 듣고, 직접 자장면을 준비하기로 했습니다. 처음에는 음식점에 자장 소스와 생면을 따로 부탁하려 했지만, 당일 준비가 어렵다는 답을 듣자 계획을 바꿨습니다. 마트에서 여러 종류의 소스와 면을 골라 한가득 사 들고 시골집으로 향했습니다.

미리 알리지 않고 찾아간 집에서는 할머니가 전동 침대에 누워 있었고, 할아버지는 방에서 주무시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부러 인기척을 내자 두 노인은 놀라며 가족을 맞았습니다. 아버지는 곧바로 부엌으로 가 소스를 데우고 면을 삶아 두 그릇을 내놓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가장 비싼 제품이라며 고른 소스는 매운 사천식 자장이었습니다. 할머니는 한 젓가락을 먹고 매워했고, 아버지는 당황했습니다. 결국 준비한 자장면은 다른 가족의 몫이 됐지만, 뜻밖의 실수마저 두 노인에게는 웃음거리가 됐습니다. 작은할아버지는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습니다.

“조카가 먼 곳에서 찾아와 자장면도 만들어주니 이런 호강이 어딨을까. 돌아보니 정말 호강하며 살았다.”

작은할아버지에게 호강은 좋은 음식이나 넉넉한 살림만을 뜻하지 않았습니다. 평생 누군가 밥을 차려주고, 가족이 찾아와 함께 웃어준 기억이 곧 호강이었습니다. 이제는 자신이 아내의 밥상을 챙기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는 과거에 받은 돌봄을 잊지 않고 고마워했습니다.

일상의 감사가 남기는 것

가족이 함께 있을 때 밥상에 숟가락 하나를 더 놓는 일은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밥을 먹고 사소한 이야기로 다투고 웃는 시간은 각자 떨어져 있을 때보다 서로가 곁에 있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해줍니다. 가족은 그런 시간이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불안을 누그러뜨리고, 지금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게 했다고 돌아봅니다.

작은할아버지의 메모는 누구나 따라 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합니다. 식사 뒤에 “잘 먹었다”고 말하는 것, 수고한 사람에게 고맙다고 전하는 것, 가족에게 먼저 안부를 묻는 일은 특별한 준비가 없어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말들이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함께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데에는 충분할 수 있습니다.

95살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한 아내를 돌보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가 붙여둔 한 줄의 메모에는 아내가 평생 자신에게 베푼 수고를 기억하겠다는 마음이 담겼습니다. 오래 함께 산다는 것은 단지 같은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아니라, 서로에게 받은 것을 잊지 않고 작은 방식으로 되돌려주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기억해야 할 장면

  • 95살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한 93살 아내를 위해 밥상을 차립니다.
  • 부엌 벽에는 식사 뒤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하라는 메모가 붙어 있습니다.
  • 가족은 자장면 한 그릇과 함께한 식사, 서로를 찾아가는 일이 삶의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돌봄이라고 되새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