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칸’을 넣자 이야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림으로 이야기를 전해왔습니다. 고대 이집트 무덤 벽화에는 씨앗을 뿌리고 곡식을 거두어 보관하는 과정이 그려져 있고, 11세기 프랑스의 바이외 자수는 노르만인의 정복 과정을 긴 천 위에 이어 담았습니다. 그림으로 사건을 설명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은 만화의 먼 조상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옛 그림에는 현대 만화의 핵심 요소가 없었습니다. 한 장면과 다음 장면을 구분하는 테두리가 없었기 때문에, 보는 사람은 어디서 사건이 바뀌는지 스스로 알아내거나 이야기를 아는 사람의 설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림에 이야기가 들어 있더라도 그림 자체가 순서와 흐름을 명확히 알려주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림을 나누는 테두리 하나가 장면과 시간, 읽는 순서까지 정했습니다. 이 ‘칸’의 발명이 그림을 연속적인 이야기 매체로 바꿨습니다.
칸은 그림을 테두리로 둘러 순서대로 배치하는 만화의 기본 표현 방식입니다. 첫 번째 칸은 한 장면을 보여주고, 다음 칸은 그 뒤에 벌어진 일을 보여줍니다. 독자는 칸의 배열을 따라가면서 무엇이 먼저 일어났고, 다음에는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를 자연스럽게 이해합니다.
이 방식은 영화와도 다릅니다. 영화 화면은 정해진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가 사라지지만, 만화의 칸은 페이지에 계속 남아 있습니다. 독자는 앞 장면을 다시 살펴보거나 마음에 드는 그림에 오래 머물 수 있고, 필요하면 몇 칸을 건너뛸 수도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감독이 관객의 속도를 주로 정하지만, 만화에서는 독자가 읽는 속도를 직접 조절합니다.
한 컷에서 연속된 이야기로
19세기 신문과 잡지에는 한 장의 그림으로 사회를 풍자하거나 어떤 상황을 요약한 만평이 많이 실렸습니다. 한 컷 만화는 짧고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효과적이었지만, 인물이 어떤 일을 겪고 그 결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충분히 보여주기는 어려웠습니다. 사건의 앞뒤를 그리려면 그림이 여러 장 필요했습니다.
그 변화를 이끈 인물로 스위스 제네바의 교사 로돌프 퇴퍼가 꼽힙니다. 그는 1837년 발표한 ‘비외 부아 씨 이야기’에서 한 면에 한 개부터 여섯 개까지 칸을 배치하고, 각 그림 아래 짧은 글을 덧붙였습니다. 그림이 단순히 한순간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먼저’와 ‘나중’이 있는 이야기로 발전한 것입니다.
칸의 힘은 그림이 그려진 부분뿐 아니라 칸과 칸 사이의 빈 공간에서도 나옵니다. 작가는 한 칸에서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동안 일어난 모든 일을 그리지 않습니다. 그 사이에 벌어진 일을 독자가 머릿속으로 연결하는데, 이 빈틈을 만화 이론에서는 ‘홈통’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한 칸에서 인물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고, 다음 칸에서 문이 열린 모습이 나온다고 해보겠습니다. 문을 두드린 뒤 문이 열릴 때까지의 시간은 그려지지 않아도 독자는 그 사이의 일을 알아서 채웁니다. 그림 몇 장만으로도 더 긴 사건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1897년 미국 신문 연재만화 ‘카첸야머 키즈’에서 말풍선이 등장하면서 칸은 인물의 말까지 담는 틀이 됐습니다. 그림으로 행동을 보여주고 말풍선으로 대화를 전하면 인물의 성격과 관계를 한층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장면, 대사, 독자의 상상력이 하나의 형식 안에서 결합하며 오늘날 만화의 기본 문법이 갖춰졌습니다.
연재만화가 독자를 다시 돌아오게 했다
칸의 발전은 만화가 만들어지는 방식뿐 아니라 판매 방식도 바꿨습니다. 한 컷 만평은 신문에 한 번 실리면 그날의 메시지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러 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다음 편을 기다리게 했습니다. 독자는 다음 장면이 궁금해 다음 호 신문이나 잡지를 다시 찾았습니다.
이것이 ‘연재’의 힘입니다. 한 번 소비되고 끝나는 그림 대신, 이야기를 여러 차례 나누어 제공하는 콘텐츠가 등장한 것입니다. 신문 발행인 조지프 퓰리처와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독자 경쟁을 벌이면서 일요일판 만화 지면을 키운 것도 연재만화의 인기가 뒷받침됐습니다.
연재는 콘텐츠를 반복해서 판매하는 산업 구조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한 편을 보고 끝나는 독자와 달리,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독자는 매주 같은 매체를 다시 구매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늘날 영상 시리즈나 온라인 연재물이 다음 편 공개일을 알리며 시청자와 독자를 붙잡는 방식도 이와 닮았습니다.
종이가 만든 무대와 그 한계
칸은 이야기의 가능성을 넓혔지만, 오랫동안 종이의 크기와 모양에 묶여 있었습니다. 한 페이지에 몇 칸을 넣을 수 있는지, 칸을 얼마나 크게 그릴 수 있는지가 정해진 지면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작가가 장면의 필요보다 남은 공간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북미 만화책의 표준 크기는 가로 약 16.8센티미터, 세로 약 26센티미터입니다. 이 규격은 1933년 미국의 한 인쇄소에서 신문지를 접어보며 찾아낸 크기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후 오랜 기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야기를 담는 형식이 종이 인쇄와 유통 방식에 의해 고정된 셈입니다.
종이는 제약만 준 것이 아니라 고유한 연출 도구도 제공했습니다.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독자는 다음 장면을 보기 전까지 앞쪽 내용만 볼 수 있습니다. 작가는 바로 이 짧은 순간을 이용해 중요한 사건을 감추거나 긴장감을 높일 수 있었습니다.
일본 만화에서는 페이지를 넘긴 직후 드러나는 장면을 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메쿠리’는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새로운 장면을 보여주며 독자의 놀라움과 기대를 끌어내는 연출입니다. 데즈카 오사무를 비롯한 만화가들이 발전시킨 표현 방식은 종이 만화만이 가진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사례입니다.
한국 웹툰, 종이 만화의 규칙을 벗어나다
웹툰의 등장은 만화 산업이 탄탄하게 성장하던 곳이 아니라, 기존 만화 시장이 크게 흔들리던 한국에서 시작됐습니다. 1997년 청소년보호법이 만화를 유해매체 심의 대상에 포함한 뒤 만화를 진열대에서 빼는 서점이 늘었습니다. 이어 외환위기와 도서대여점 중심의 소비 변화가 겹치면서 만화잡지 시장도 위축됐습니다.
연재할 지면을 잃은 작가들은 2000년대 초 인터넷 포털로 이동했습니다. 당시 포털은 이용자가 사이트에 오래 머물게 할 콘텐츠가 필요했고, 만화는 온라인에서 독자를 모을 수 있는 매력적인 소재였습니다. 2003년 강풀의 ‘순정만화’가 다음의 온라인 만화 서비스에서 연재되며, 인터넷 화면을 무대로 한 장편 만화가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웹페이지에는 종이책처럼 정해진 판형이 없습니다. 페이지를 접거나 넘길 필요도 없으므로, 작가는 지면의 크기에 맞춰 칸을 배열하지 않아도 됩니다. 화면을 아래로 이어 붙이는 세로 스크롤 방식은 종이 만화가 오랫동안 따라온 규격을 사실상 풀어놓았습니다.
웹툰은 만화를 종이에서 화면으로 옮긴 데 그치지 않았습니다. 칸 사이의 간격과 독자가 화면을 움직이는 방식까지 이야기의 일부로 만들었습니다.
세로로 긴 화면에서는 칸 사이의 여백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습니다. 여백을 길게 두면 독자가 다음 장면을 만나기까지 시간이 늘어나고, 칸을 촘촘하게 배치하면 사건이 빠르게 이어지는 느낌을 줍니다. 종이에서는 독자가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에 주로 작가의 연출이 개입했다면, 웹툰에서는 화면의 길이와 여백으로도 장면의 속도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이런 표현 방식을 더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독자는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밀어 올리며 한 칸씩 이야기를 만납니다. 특히 공포물에서는 무서운 장면 앞에 긴 빈 공간을 두어 독자가 천천히 화면을 움직이게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칸이 언제 나올지 모르는 긴장감을 만든 뒤 갑자기 장면을 드러내는 연출은 종이 페이지에서 구현하기 어렵습니다.
플랫폼과 장르가 함께 키운 산업
웹툰은 새로운 화면 형식인 동시에 연재와 유통을 묶는 디지털 산업이기도 합니다. 온라인 플랫폼은 작품을 독자에게 전달하고, 독자의 반응을 확인하며, 여러 작품을 한곳에서 연재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합니다. 종이 잡지의 발행 주기와 유통망에 의존하던 방식과 비교하면 작품이 독자를 만나는 경로가 다양해진 것입니다.
세로 스크롤에 맞춘 연출은 다른 콘텐츠 형식으로 옮겨갈 때도 강점이 될 수 있습니다. 인물과 사건이 선명한 연재 이야기는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 각색될 수 있고, 등장인물과 세계관은 상품과 다른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독자가 온라인에서 작품을 먼저 만나고, 이후 영상이나 출판물로 접하는 흐름도 만들어집니다.
다만 웹툰이 성장한다고 해서 종이 만화가 곧 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종이책은 페이지를 한눈에 펼쳐 보는 경험과 소장 가치를 제공하고, 작가가 독자의 시선을 한 페이지 안에서 설계할 수 있게 합니다. 디지털과 종이는 서로를 완전히 대체하기보다 각기 다른 감상 방식과 유통 경로를 제공할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 시장도 디지털 중심으로 이동
종이 만화 산업이 강했던 일본에서도 변화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원래 일본 만화는 잡지에 작품을 연재한 뒤 단행본으로 묶어 판매하고, 인기 작품을 애니메이션이나 관련 상품으로 확장하는 구조가 발달했습니다. 이미 성공적인 산업 구조와 오랜 제작 관행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형식으로 바꿀 필요성이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스마트폰과 디지털 유통이 보편화되면서 독자의 소비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2025년 일본 만화 시장에서 전자만화가 차지한 비율은 76.1%에 이르렀고, 종이 만화잡지 매출은 한 해 동안 12.7% 감소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종이 중심의 시장에서도 독자가 만화를 접하는 주요 통로가 빠르게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수치입니다.
일본 출판사 슈에이샤가 2024년 세로 스크롤 방식의 ‘점프툰’을 시작한 것도 이런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오랫동안 종이 만화를 이끌어온 업체가 디지털 형식에 나선 것은 새로운 독자층과 이용 습관에 대응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종이책과 잡지가 당장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만화 산업의 중심이 디지털 플랫폼 쪽으로 이동하는 흐름은 이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만화의 역사는 ‘배열’을 바꾼 역사
만화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림을 어떤 순서와 모양으로 배열하느냐가 표현의 폭을 바꿔왔습니다. 그림을 칸으로 나누자 독자는 장면의 순서를 이해하게 됐고, 칸 사이의 빈틈은 상상력을 끌어들였습니다. 종이의 페이지 넘김은 긴장감을 만드는 도구가 됐으며, 디지털 화면의 세로 스크롤은 여백과 읽는 속도를 새롭게 활용하게 했습니다.
웹툰이 한국에서 빠르게 발전한 배경에는 기존 산업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지켜야 할 출판 관행과 성공한 유통 구조가 상대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작가와 플랫폼은 인터넷에 맞는 형식을 실험할 수 있었습니다. 시장의 붕괴는 창작자에게 어려움을 안겼지만, 동시에 종이 중심의 규칙을 넘어설 계기도 됐습니다.
앞으로 만화는 화면 크기와 기기의 변화에 맞춰 또 다른 표현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독자가 화면을 움직이는 속도, 소리와 움직임을 더하는 방식, 작품을 추천하고 유통하는 기술이 이야기의 전달 방식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기술이 등장하더라도 독자가 장면을 이해하고 인물의 감정에 몰입하도록 만드는 이야기의 힘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칸’의 발명이 그림에 시간과 순서를 부여했다면, 웹툰의 세로 스크롤은 독자가 이야기를 만나는 방식을 다시 설계했습니다. 만화 산업을 바꾸는 힘은 언제나 새로운 도구 자체보다 그 도구를 이용해 장면과 장면 사이를 어떻게 연결하느냐에서 나옵니다. 한국 웹툰의 세계적 확산은 그 변화가 산업의 위기와 새로운 시도의 만남에서 비롯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