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어 플랜 없음” 이후에 시작되는 일들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 암을 줄이거나 합병증을 해결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수술과 항암제, 시술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고 판단될 때 의료진은 이렇게 알릴 수 있습니다. 환자와 가족에게 이 말은 치료가 끝났다는 통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돌봄의 방향이 달라지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의료인류학자 강지연의 신간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는 이 선언을 단순한 치료의 종결로 보지 않습니다. 생명을 연장하는 치료의 선택지가 줄어든 뒤에도 통증을 덜고, 환자가 원하는 돌봄을 논의하고, 가족과 의료진이 함께 남은 시간을 준비하는 일이 이어집니다.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모든 돌봄이 끝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무엇을 치료할 것인가에서 어떻게 편안하게 지낼 것인가로 돌봄의 초점이 옮겨가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말기’가 만들어지는 과정
강지연은 2016년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의 인공호흡기 제거를 둘러싸고 가족들이 갈등을 겪고, 의료진이 책임을 피하려는 듯한 방어적 진료를 하는 모습을 경험한 뒤 생애 말기 의료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대형 상급종합병원(중증 질환을 진료하고 고난도 치료를 주로 맡는 대형 병원)의 말기암 병동에서 2년 동안 현장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저자는 환자와 가족의 일상을 지켜보고, 완화의료팀이 환자 곁에서 일하는 방식도 관찰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말기 병동이 이미 말기 판정을 받은 사람만 머무는 공간이 아니라, 환자와 가족이 치료의 한계와 새로운 돌봄의 필요성을 조금씩 마주하는 경계의 공간이라는 점을 살폈습니다.
병원에서는 ‘말기’라는 표현이 쉽게 쓰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치료를 계속할 수 있는지, 환자가 어떤 상태인지, 가족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그 시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말기는 검사 결과만으로 한 번에 결정되는 단계라기보다, 환자와 가족, 의료진이 현실을 이해하고 다음 돌봄을 조정하며 마주하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치료의 목표가 바뀌면 돌봄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치료 가능성이 줄어든 뒤에도 환자의 통증과 호흡 곤란, 불안 같은 증상을 줄이는 일은 계속됩니다. 호스피스 연계를 논의하고,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원하는 장소와 돌봄 방식을 확인하며, 가족이 환자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싶은지 살피기도 합니다.
이는 자동차를 더 빨리 달리게 하는 수리가 어려워졌다고 해서 운전자와 동승자를 돕는 일이 끝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목적지가 바뀌면 필요한 지원도 달라집니다. 의료진은 질병을 없애는 데 집중하는 대신, 환자가 겪는 고통을 줄이고 남은 시간을 가능한 한 편안하게 보낼 수 있도록 역할을 바꾸게 됩니다.
완화의료는 환자와 가족을 함께 돌봅니다
완화의료(완치나 생명 연장만을 목표로 삼기보다 통증과 괴로움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돌봄)는 신체 증상만 관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환자의 불안과 외로움, 가족의 부담과 슬픔, 사회적 지원의 필요성까지 함께 살피는 전인적 돌봄입니다.
완화의료팀은 병실을 찾아가 차를 권하거나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누며 환자와 가족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알아갑니다. 작고 평범해 보이는 대화가 중요한 이유는 환자가 의료진에게 말하기 어려웠던 걱정이나 가족이 감당하는 어려움을 드러내는 계기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팀원들은 각자 파악한 상황을 모아 회의하고, 환자와 가족에게 맞는 돌봄을 조정합니다. 예를 들어 통증을 줄이는 방법과 함께 가족이 환자 곁에서 쉴 수 있는 지원, 임종에 앞서 필요한 설명과 상담을 함께 논의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처방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여러 사람이 나누어 살피는 방식입니다.
- 신체적 돌봄: 통증과 호흡 곤란, 메스꺼움 등 괴로운 증상을 줄입니다.
- 심리·사회적 돌봄: 불안과 고립감을 살피고, 가족이 겪는 부담과 갈등을 함께 다룹니다.
- 임종 및 사별 지원: 임종을 준비하는 환자와 가족을 돕고, 사망 뒤 유가족이 슬픔을 나눌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대화와 예술 활동으로 관계의 매듭을 풀다
책이 주목하는 또 다른 돌봄은 환자와 가족 사이의 관계를 다시 살피는 일입니다. 의미요법(자신의 삶에서 중요했던 경험과 가치를 돌아보며 의미를 찾도록 돕는 상담)이나 미술치료는 환자가 말로만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과 기억을 꺼내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환자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누구에게 미안했는지, 누구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가족도 평소 나누지 못한 감정을 표현하면서 서로를 새롭게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은 갈등을 모두 없애거나 관계를 완벽하게 회복시킨다고 보장할 수는 없지만, 남은 시간에 서로의 마음을 전하도록 돕는 의미가 있습니다.
말기 돌봄의 중심에는 의료 기술뿐 아니라 손을 잡고, 머리를 감기고, 이야기를 듣는 일도 있습니다. 때로는 “고마웠다”거나 “미안했다”고 말할 수 있는 시간이 환자와 가족에게 중요한 돌봄이 됩니다.
강지연의 연구가 소개하는 돌봄은 ‘좋은 죽음’을 하나의 정해진 결과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환자와 가족, 의료진이 관계를 만들고 이어가는 과정 자체를 돌봄의 중요한 부분으로 봅니다. 환자가 사망한 뒤에도 사별 가족 모임을 통해 유가족이 슬픔을 나누고 새로운 지지 관계를 맺도록 돕는 활동이 이어질 수 있습니다.
‘새로운 안정’은 돌봄의 관계망에서 생깁니다
책에서 말하는 안정은 질병이 사라져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상태와 다릅니다. 환자와 가족이 혼자 감당해야 한다고 느끼지 않도록 주변의 지원이 이어지고, 자신의 감정과 필요를 말할 수 있는 관계가 마련되는 데서 얻는 정서적·존재적 안정입니다.
돌봄을 받은 가족 가운데 일부가 나중에 병동으로 돌아와 봉사자로 활동하는 사례도 소개됩니다. 돌봄을 받는 사람과 제공하는 사람의 역할이 고정돼 있지 않고, 경험이 다른 사람을 돕는 관계로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병원 제도와 급성기 치료 중심 구조의 한계
현장 연구는 말기 돌봄이 병원 시스템 안에서 여전히 주변부에 놓여 있을 수 있다는 점도 드러냅니다. 연구가 이뤄진 병원에는 전용 호스피스 병동이 없었고, 완화의료팀의 사무 공간과 임종을 위한 공간도 제한적이었습니다.
대형 병원은 응급 환자를 치료하고 고난도 수술이나 시술을 제공하는 역할에 맞춰 운영됩니다. 이런 구조에서는 환자가 오래 머물며 일상적인 돌봄과 상담을 받는 일이 병원의 중심 목표와 충돌할 수 있습니다. 병상 회전과 치료 실적을 중시하는 환경에서는 통증 조절, 가족 상담, 사별 지원처럼 시간이 필요한 돌봄이 충분한 자원과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 호스피스와 완화의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가 적절한 시기에 안내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의료진이 환자와 가족의 선호를 충분히 듣고 함께 결정할 시간과 여건이 필요합니다.
- 임종과 사별 이후까지 이어지는 돌봄을 병원과 지역사회가 연결해야 합니다.
이런 과제는 병원 한 곳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습니다. 병원 운영 기준과 의료 인력 배치, 지역사회 돌봄 자원, 환자와 가족에게 제공되는 정보가 함께 뒷받침돼야 합니다. 말기 돌봄을 의료의 부수적인 업무로 취급하지 않고, 환자와 가족의 필요에 맞춰 지속적으로 제공할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죽음’은 무엇을 의미할까
책은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되묻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 죽음은 생명을 무조건 늘리거나 반대로 서둘러 끝내는 것이 아닙니다. 통증이 조절되고, 환자가 편안한 환경에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지지를 받으며, 자신의 뜻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핵심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의료적 판단과 함께 환자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묻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장 원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통증을 줄이거나 종교적·개인적 의식을 지키는 일을 우선할 수 있습니다. 환자마다 원하는 바가 다르므로, 좋은 돌봄에는 정답 하나를 강요하기보다 원하는 것을 확인하고 존중하는 대화가 포함돼야 합니다.
치료할 방법이 더는 없다는 말이 나온 뒤에도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남아 있습니다. 통증을 줄이는 일, 마음을 나누는 일, 가족이 서로의 뜻을 확인하는 일은 계속 돌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 말기 돌봄을 논의할 때에는 의료 기술의 유무만이 아니라 환자와 가족이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도 함께 살펴야 합니다. 호스피스와 완화의료에 대한 정보를 더 일찍 제공하고, 환자가 원하는 돌봄을 의료진과 가족이 미리 이야기할 수 있다면 위기 상황에서 급하게 결정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돌봄은 치료가 끝난 뒤에도 이어진다
강지연의 관찰이 전하는 핵심은 말기 환자의 시간이 돌봄과 관계의 가능성이 사라지는 때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무엇을 더 치료할 수 있는지에만 집중하던 시선을 환자의 고통과 바람, 가족의 관계와 지원으로 넓혀야 하는 시기입니다.
“더 이상 케어 플랜이 없습니다”라는 선언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묻는 새로운 질문을 남깁니다. 그 답은 첨단 치료만이 아니라 증상을 세심하게 살피고, 환자의 이야기를 듣고, 가족이 서로에게 마음을 전하도록 돕는 일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치료 선택지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돌봄의 선택지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말기 돌봄은 환자와 가족이 혼자 남겨지지 않도록 관계를 잇고, 각자의 삶에서 중요했던 것을 존중하는 과정으로 계속될 수 있습니다.



















